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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건축 개요, 역사적 배경 및 주요시설

by dangdang999 2023. 7. 13.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법궁)이다. 적 제117호로 지정받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4]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건축 개요

경복궁(yeongbokgung Palace)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법궁(정궁)이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경복'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법궁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고종 2년인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강점기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이다.

 

역사적 배경

태조의 창건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열어 1394(태조 3)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1395)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 경기우도 인부 5,000,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 〈주아에 나오는 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1, 둘레 1813(보는 6)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1398)으로,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전각 확대와 1553년 화재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1411)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세종 8)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푸른 기와)가 올라 간다. 명종 8(1553)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 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겸재 정선이 1754년경 그린 경복궁도의 광화문은 기단석축, 경회루는 밑기둥만 남은 채 울창한 숲으로 변한 모습이다. 1592년 선조 때에 임진왜란으로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 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고자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을 난민들이 불태웠다는 것이 실록의 기록되어 있다. 이기의 송와잡설과 류성룡의 서애집등에서도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는 내용의 기록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조선 백성들이 방화의 주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으로, 이들이 실제로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 4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인해 조선 백성들이 경복궁을 전소시킨 것은 아니었다는 설이 제기된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의 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본다.

 

흥선대원군의 중건

소실 후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426(고종 2년 음력 42)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57(음력 413) 공역이 시작되어 1868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으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고종 32(1895)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살해당하고(1895년 을미사변),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이 시기 경복궁은 비록 왕이 머무르는 거처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관리되었다.

 

주요시설(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을 두고 중앙에 근정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궁궐 내 설치된 여러 관청)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흥례문, 영제교, 기별청,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천추전, 만춘전, 수정전, 강녕전, 교태전, 경회루 등이다. 주요 시설과 의미는 아래와 같다.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1395년에 축조되었으며, 원래의 이름은 남문이었으나, 세종 때에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이라 이름을 변경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다.

경회루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의 인공 연못 안의 섬에 지은 정면 7,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로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장소로 사용하고자 지은 것이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 대 방지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된다.

근정전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 좌우로 문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 쌍의 품계석이 놓여 있으며, 건물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 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다.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가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근정문

근정문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전인 근정전과 정문인 광화문, 중간문인 흥례문을 잇는 문으로 보물 제812호다.

강녕전

왕이 거처하던 곳으로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써 지었으며, 연산군, 인종, 영조 등이 거처한 곳이다. 주로 근정전에서 업무를 보고 이곳에서 자기도 했다.

교태전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이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의 괘 이름이다. 폐비 윤씨가 거처하였고 연산군이 태어난 곳이며,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인성왕후, 정순왕후, 철인왕후 등이 거처하였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