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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한옥마을 개요, 역사(유래), 문제점 및 특징

by dangdang999 2023. 7. 14.

북촌한옥마을은 서울에서 가장 한국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위 사진은 한국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북촌한옥마을. 북촌한옥마을은 600년 전부터 양반층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며 한옥마을을 보존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에는 중요한 역사적 자산들이 남아있으며, 한옥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거리가 많아 매력적인 관광지로 손꼽히는 명소다.

 

북촌한옥마을의 개요

북촌한옥마을은 600년 수도의 역사를 자랑하듯 전통 한옥들이 즐비한 동네로 보통 경복궁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무엇보다 지금도 사람들이 실생활 공간으로 삼고 있는 생활한옥촌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그 가운데 옛 한옥의 정취를 가장 잘 느껴볼 수 있는 지역은 아무래도 가회동 인근이다. 북촌한옥마을은 우리 전통 한옥의 매력이 재발견되면서 서울의 여행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옥 갤러리나 전통 공방, 한옥을 개조한 한옥 레스토랑도 있어 전통적이면서도 이색적인 매력이 있다. 골목마다 역사와 과거부터 이어오는 시간이 담긴 북촌한옥마을 안에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전통 주거문화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는 북촌문화센터, 주민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한옥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북촌마을서재와 작은 전시가 있는 공간인 작은 쉼터 갤러리가 있다.

 

역사(유래)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왕조 때부터 왕족, 양반, 관료 출신들이 살았던 고급 가옥이 대부분이라 하여서 일각에서는 '양반촌', '양반 동네'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한옥이 일부 증축, 개축되고 1992년 가회동 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어 한옥 이외에도 일반 건물도 들어섰다. 특히 원서동은 업자들이 유혹해 빠르게 빌라가 들어서 이전의 풍경을 잃었다. 2001년 서울시가 '북촌가꾸기사업'을 진행하여 한옥과 주변 경관을 개선해 2009년 유네스코 아태문화유산상 우수상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디벨로퍼라 불리는 부동산개발업자 정세권이 조성한 한옥대단지이다. 경상남도 고성군 출신 정세권은 1919년에 상경한 뒤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경성부)은 급팽창하고 있었다. 지방 빈농의 유입도 급증하고, 일본인의 서울 이주도 급증했다. 인구 증가는 주택난을 불렀다. 당시 청계천 남쪽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는데, 일본인들이 증가하자 청계천 북쪽으로까지 확장을 노렸고, 조선총독부는 정부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들인 후 일본인을 진출시키는 방식으로 청계천 북쪽으로 일본인 거주지 확장을 주도하였다. 당시 북촌은 일제 침략으로 어려워진 권세가들이 내놓은 집들이 많았다. 정세권은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조선인 건설업자들과 함께 민간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하였다. 권세가, 양반들이 소유하였던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 채의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조선인 주거지역을 확보하고 고유 주거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한옥 집단지구에 공급된 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를 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하는 등 근대적인 편리함과 생활약식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이었다. 소규모 도시한옥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이 한몫했다. 정세권의 회사인 건양사는 한 해 평균 300채의 한옥을 공급했는데 1920년대 한성(서울)의 연간 주택공급량은 1,700채 정도였고, 정세권은 그 중 20%를 담당했다. 경성의 '건축왕'이라 불렸다. 북촌 한옥의 대부분은 정세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세권은 경성의 한옥단지 개발로 10년도 안 돼 부동산 재벌이 됐다. 그렇다고 돈 버는 데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3년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정세권은 경성지회 설립을 주도했다. 좌우 독립운동 연합체인 신간회 운동에도 참여해 재정 담당을 맡아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사업 후원을 이어갔다.

 

문제점 및 특징

북촌 지역은 거주지역으로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며, 관광지화 된지도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된다. 그러나 관광객 입장에선 그저 돌아다니면서 보고 즐기는 관광지일 뿐이다. 이 점은 관광지화 된 국내외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 주로 동대문과 면세점을 뺑뺑이 돌리는 저가중국여행사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무료(?)인 북촌을 애용하고 있다. 가보면 거주민보다 한복 입고 사진 찍는 외국인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이 때문에 여러 마찰이 발생하게 된다. 분명히 차도임에도 거주자 차량이 관광객 때문에 통행하기 어려워졌고 일부 관광객은 왜 이런 곳으로 차가 다니냐고 툴툴대기도 한다. 소음 문제의 경우 민원이 많이 들어온다. 2001년부터 6년여간 했던 북촌가꾸기사업도 또 다른 문제점을 낳았는데, 마을 정비에 따라 지가가 1억 원 근처까지 치솟아 원주민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는 재벌집 등 금수저들이 터를 잡았다. 더 나아가 개조된 한옥도 콘크리트를 쓰고 내부까지 현대식으로 만들어 한옥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기도 하며 투기도 빈발했다. 이에 따라 영국인 거주자 데이비드 킬번(1943~2019)이 한옥 원형보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옥의 대부분이 팔각지붕을 한 기와집이며, 대부분의 구조는 평면이 ''이나 '' 모양으로 된 도시형 한옥구조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마당이 노출된 전통한옥과 달리, 길에서 보면 높은 대문과 방으로 막혀 집 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2000년대 들어 개축하지 않은 한옥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한옥 개축을 장려한 터에 최근 지은 한옥은 전형적인 도시한옥에서 많이 벗어났다. 다만 여전히 담장은 높은데, 범죄 위험도 있지만 관광객 때문에 높게 올리지 않곤 못 배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