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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의 개요, 역사, 특징 및 축성 방법

by dangdang999 2023. 7. 18.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부친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하였다.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되었으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수원화성의 개요

수원 화성(水原 華城) 혹은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에 있는 길이 5.52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수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일부가 파괴되어 이후 재건한 건축물이지만, 화성을 계획할 당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관련 내용을 기록해 둔화성성역의궤가 남아있어 이를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 설계도와 작업 진행기록이 모두 남아 있어 현대에 이르러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 한마디로 유지보수가 가능한 세계기록유산이다.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대한민국의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지형에 맞추어 읍성과 산성의 구조가 모두 존재하도록 축조되었다.

 

역사(축성 배경)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한 이유와 유사하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이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 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동쪽(광주)과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이다.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어머니 혜경궁홍 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다.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총 길이가 약 5.5km이다. 또 화성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구조와 특징

군사적으로도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치성의 활용으로, 성벽 전체 구간에 치성을 갖추어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사각 없이 서로를 엄호할 수 있는 성형 요새의 삼각형 포루(砲樓)다. 당시 조선은 화포에 대비하여 특별히 새로운 설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성벽이 화력을 견디지 못해 성형요새가 등장하는 유럽이라면 모를까, 19세기 이전에 화포로 성벽을 완전히 때려 부수는 것은 대형 화포 사용 비중이 극도로 낮은 동아시아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성첩(성 위에 병사들의 엄폐물로 쌓은 담장)을 무너트리거나 외벽을 일부 파손해서 기어 올라갈 만한 틈을 만드는 게 한계였다. 평지에 쌓은 전축성의 경우엔 홍이포쯤 되는 화포로 집중 사격하면 벽 일부를 뚫을 수 있긴 했지만, 그런 성은 다중성벽이 기본이라 효율적인 짓은 아니었다. 성벽 높이도 삼년산성 같은 삼국시대의 거대 성벽이나 해외의 거성에 비교하여 낮은 것이지 조선시대의 읍성치곤 그렇게 낮지도 않다. 수원화성의 성벽이 낮은 직접적인 원인은 예산 부족이다. 원안은 25척의 높이를 가진 성벽을 쌓는 거였는데 예산이 딸려서 20척 높이로 낮춰 쌓았다고 한다. 사실 수원화성은 조선에서 중국식 성곽 시설을 도입하여 쌓은, 기존에 없던 성곽 건축의 시제품으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지 군사 요새로서는 여러모로 부실한 점이 많다. 치성이 잘 갖춰있긴 해도 다중성벽에 천연 해자를 갖춘 진주성, 평양성이나 지금 가도 토나오는 험지에 지은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성벽 뒷 쪽에 파낸 흙으로 둔덕을 쌓아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는 등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크다. 간혹 팔달문=수원화성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나 팔달문은 화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양도성의 숭례문(남대문)과 마찬가지로 교통을 이유로 좌우의 성벽이 헐린 상태라서 독립적인 건축으로 보일 뿐이다. 수원화성을 짓는 중에 정조가 수원유수부 관아를 화성행궁에 위치시켰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면서 1912년 수원유수부를 철폐하여 관아가 폐지되었다. 이후 수원부청이 세워졌으나 조선총독부의 결정으로 수원부청은 수원화성 바깥으로 나가게 됐다. 결국 현대에 와서 수원화성 내부에는 오랫동안 수원시청 및 수원시 관련 행정관청이 단 하나도 없었다. 20144, 팔달구청이 수원화성 내부 종로사거리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102년 만에 수원화성 내부에 수원시 지방관청이 처음으로 복귀했다.

 

축성방법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1010(음력 910)에 준공되었다. 팔달산의 채석장에서 채굴한 벽돌로 쌓은 축성 공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 기재를 사용해 만들었다. 수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관례적으로는 국가가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성곽 건설에 병역의 의무로 동원된 백성들에게도 일반 건설현장과 같은 적절한 임금을 나라에서 일반 노동자들과 차등을 두지 않고 그대로 지급하였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은 충신, 군사력, 자금 이 세 가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서울(수도)에서는 이 세 가지 것을 모두 얻기 어려워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 신도시가 바로 수원화성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사도 세자)를 여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컸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아버지의 묘를 더 좋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처음 옮겨진 곳은 영우원이었고, 이후 옮겨진 곳이 천 년에 한 번 나올 명당이라 극찬했던 경기도 화성시 송산리 인근의 화산자락에 현륭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원래 화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할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원화성이다.